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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커버넌트

ALIEN: COVEN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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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112분

SF · 호러 · 액션

멸망해가는 지구, 새로운 정착지를 찾기 위해 우주로 탐사에 나선 라세하스 호는 생명체가 살 법한 한 행성에 도달하여 탐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행성에 도착한 탐사대는 예상과는 달리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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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KE#1

   젠장.  우선 이것부터 정리하자.

   항해 도중에 크루를 이렇게 잃은 건 모두의 예상 밖이었어. 그때 얼마나 끔찍한 기분이었는지는… 되새기고 싶지 않아. 정신이 나갈 것 같으니까.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계획이 수정되는 걸 못 견딜 만큼 융통성이 없는 건 아니라고. 까탈스럽다는 말 좀 그만해! 갑작스럽게 행선지가 변경됐다는 걸로 토를 다는 게 아니야. 

   문제는 검증이 끝난 행성이 가까워졌는데, 왜 갑자기 쌩판 모르는 행성에 착륙을 하려고 하냐는 거야. 그 메시지 뭔가 수상해. 태양계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졌는데 해석이 가능한 레코드를 우연히 만날 수 있다고? 함장은 구조신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아니라는 건 다들 분명히 알아. 그냥 긴 항해에 지쳤으니까. 당장 발 딛을 땅이 필요하니까 덥석 미끼를 문 거야.  

   그래, 솔직히 말하면 느낌이 안 좋아.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도, 그냥 그래. 미친 놈처럼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이렇게 반대해도, 함선에서 착륙을 반대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지. 내 말 같은 건 어차피 아무도 안 들어. 결국 며칠 내로 그 정체불명의 행성에 도착하게 될 거야. 지구의 목소리를 담은 전파의 근원지. 물과 대기가 존재한다는 그 미확인 행성에.  

   ……제발,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제1장

   “불편하신가요.” 

   “어? 아니… 아니야.”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소그가 반짝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소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란제이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표정이 안 좋으시길래요.” 

   “…….” 

   “맥박도 평소보다 빠릅니다.” 

   “나도 알아. 그건… 그냥 좀 긴장해서 그래.”

   소그는 석연치 않은 투로 인정했다.  

   “이 행성 때문입니까.” 

   “뭐, 그렇지.” 

   “착륙을 반대하셨으니까요.” 

   “……씨알도 안 먹혔지만.” 

   “캡틴은 이 행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란제이의 말을 들은 소그가 몇 마디 투덜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정착지를 바꿀 거면 지구에서 몇년간 그 고생을 하며 행성을 선정할 이유가 있었냐느니, 느낌이 안 좋다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발걸음만은 착실해서, 그와 란제이는 어느덧 담당한 구역 대부분을 돌아본 참이었다. 

   지구는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 전, 세계 각국의 정부는 이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많은 나라가 우주로 눈을 돌려 지구 대신 살아갈 행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아내는 국가가 미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될 것은 당연했으므로 자연스레 국가간 경쟁이 붙었다. 소그가 탑승한 우주선 라세하스 호 역시 그 불타는 경쟁 속에서 출발한 탐사선 중 하나로, 지구를 대체할 후보 행성의 탐사와 검증, 그리고 정착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미지의 우주로 쏘아올려졌다. 

   신세계의 개척이라는 사명을 진 만큼 라세하스 호의 선원은 각종 검사와 시험을 거쳐 선발되었는데,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한 선원들 사이 소그는 그야말로 툭 튀어나온 이레귤러였다.

   소그. 24세, 남성. 법적인 가족관계 없음. 항공우주국 소속 인턴 엔지니어.  

   그는 학력이 대단히 높지도, 신체가 건장하지도, 하다못해 성격이 좋지도 않았다. 항공우주국 인턴치고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이 분야에서 조기졸업은 그렇게 특이한 이력도 아니었다. 그가 선발된 이유는 단순히 10여년 전, 그 자신조차 어렴풋하게 기억할 정도로 어린 시절 우주를 왕복했던 경험이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관리위원회는 수많은 지원 서류 대신 기록을 뒤져 소그를 찾아냈고, 반강제적으로 그를 라세하스 호에 탑승시켰다. 우주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을 보내는 쪽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교육해서 보내는 것보다 저렴하고 안전하다는 논리였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한 반발은 서류 몇 장으로 정리되었다. 까다로운 검사도 어려운 시험도 거치지 않은 그는 ‘항공우주 특수 엔지니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개척민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 예외적인 선발이 탑승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건 당연지사였다. 개척선 탑승을 위한 교육을 받을 때부터 마침내 함선에 올라 우주로 나갈 때까지, 소그는 거의 따돌림에 가까운 시선과 태도를 견뎌야만 했다. 

   “대기 검사 결과 유해물질은 없습니다.” 

   “잘 됐네. 그래도 뭔가 찝찝하군…”

   란제이가 평탄한 목소리로 알려주었지만 소그는 산소 마스크를 만지작거렸을 뿐 벗지는 않았다. 숨이 답답한 것보다 기묘한 불안감이 더 신경쓰였다. 한동안 말없이 행성을 걷던 소그가 불쑥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인체에 유독한 물질은 없는 것 같네요.” 

   “그런 거 말고… 이 행성 말이야. 정착지로 괜찮아 보이냐고.” 

   “조건은 아직 더 따져봐야겠죠. 전망이 나쁘지는 않고요.” 

   란제이의 답변은 당연하게도 정석적이었다. 소그는 잠깐 멈춰 서서 란제이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란제이는 표정 변화 없이 소그와 눈을 맞췄다. 정교하게 세공된 푸른 눈. 흠 하나 없고, 핏줄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하게 매끄러운 구슬의 표면이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무 문제도 없어. 네 말이 맞겠지…”  

   소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란제이는 “그런가요.” 하고 대답하고는 다시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다.

   란제이는 블러스트리 사에서 제조된 인간형 안드로이드로, 놀라울 정도로 사람과 유사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블러스트리 사의 창립자인 아토즈 블러스트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란제이의 모델은 어린 시절 불우한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그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들의 사망 후, 남아있는 사진과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블러스트리 사의 휴머노이드 란제이를 설계했다는 것이다.

   ‘블러스트리 사의 기술은 죽음을 넘어서는 미래를 담고 있다. 란제이는 내 어린 아들이 존재했다는 증명이며, 그 아이가 아직도 세상에 남아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토즈 블러스트리의 인터뷰를 두고 과학계에서는 한동안 윤리 논란이 일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인간의 뇌는 결국 편의성에 승복하게 되어 있다. 최신식 연산 체계와 정교한 인격 프로그램, 우수한 기체를 갖춘 란제이는 곧 항공우주 분야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젠 어디에서나 란제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란제이가 라세하스 호의 승객이 아니라 비품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분명히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엔지니어 소그?” 

   “아, 그, 아무것도 아니야.” 

   시선이 떠나지 않자, 란제이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소그를 바라보았다. 소그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손을 내저었다. 

 

   TAKE#2

   아무튼 우리는 행성에 착륙했고, 몇몇씩 팀을 이뤄서 구역을 돌기로 했어. 내 동행은… 란제이였고.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 건데 내가 사적으로 요청한 게 아니야. 행성 대기가 란제이의 기체에 영향을 줄 때를 대비해서… 엔지니어인 내가 동행한 거라고. 

   대기 분석 결과 지구의 유기체가 살 수 있는 수준의 산소가 확인됐어. 란제이가 말하길 특별한 유해물질도 없다더군. 식수로 쓸만한 물웅덩이도 있었고. 심지어 밀과 비슷한 작물을 발견했단 팀도 있었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기본 조건은 다 충족한 거지. 

   그런데 좀 이상해. 아니,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감이 나쁜 게 아니야. 이번에는 근거가 있다고!

 이렇게 조건이 완벽한데, 아무리 행성을 돌아다녀도 생명체는 코빼기도 안 보였어. 생명활동에 방해되는 게 없다면 이렇게 깨끗할 리가 없잖아? 고등 생명체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곤충이나 절지동물이라도 발견되어야 하는 건데.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보여. 한마디로, 이 행성에는 생태계가 없다고. 함장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정착하는 게 더 쉬우니 잘 된 거 아니냐’고 하던데. 머리가 비어도 정도가 있지.

   여긴 뭔가 이상해. 절대로 안심해선 안돼.  

 

 제2장 

   개척선 승선을 위해 훈련을 받던 시기, 소그는 인생에서 최고로 꺼림칙한 기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라세하스 호에 선택받은 인간들은 소그와는 태생부터 다른 것 같았다. 그들은 툭 튀어나온 돌부리 같은 소그를 귀여워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멸시했다. 그들이 친목을 도모한다며 술자리를 가질 때 소그는 혼자 남아 우주선의 장비를 손봤고, 매뉴얼을 수도 없이 읽으며 항해에 대비했다.  

   - 도와 드릴까요.

   - 엉?

   -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때 소그의 곁에 머무르며 이야기를 나눠준 건 란제이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그의 곁에 머무른 게 아니라 탐사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거였지만, 어쨌든 소그는 그가 자신을 위해 옆에 있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주변을 스캔하던 란제이는 소그가 무거운 장비를 옮기는 걸 돕고, 매뉴얼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설명해 주었다.

   선택받은 개척민들은 대체로 훈련에 불성실했던 탓에 훈련실에는 소그와 란제이 둘만 남는 일이 많았다. 소그는 항해를 대비해서 란제이의 설계도를 꼼꼼하게 살폈고, 그의 기체 일부를 수리해 주었다. 블러스트리 사의 품위 있는 안드로이드는 ‘정상 작동 확인’을 ‘잘 되네요. 고맙습니다.’ 라고 바꾸어 말할 줄 알았다. 사용자에게 친근감과 안정감을 주기 위한 설계였다.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음성. 인간들 사이에서 특이점 취급 받던 소그는 설계자의 의도 아래 무력하게 굴복했다. 그 상태로 몇 달이 지나자, 소그의 곁에 란제이가 서는 모습이 어느샌가 당연해졌다.  

   블러스트리 사의 안드로이드 란제이.

   그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휴머노이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인식하고 적절한 도움을 주는 기계였다. 그러니 란제이의 친절은 자전거 페달을 돌렸을 때 앞으로 나아가거나 자동문 앞에 섰을 때 문이 열리는 것처럼 당연했다. 행위가 아니라 작동이며, 그 과정과 결과 일체에는 어떤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토즈 블러스트리는 란제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윤리 논쟁에 대해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기술이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란제이는 인간이 될 수 없다. 그것이 피와 살이 아닌 철근과 전선으로 만들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은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답은 과학도와 인문학도 양측을 그럭저럭 만족시켰고, 란제이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소그 역시 아토즈 블러스트리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란제이의 설명서도 충분히 읽었다. 란제이와의 시시콜콜한 대화는 정교한 AI 프로그램에 의해 설계된 결과값이며, 그 어떤 독자적인 의지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 곧 출항이군. 

   - 그렇네요. 

   - ……넌 안 불안하지? 

   - 해야 할 일입니다.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 엔지니어 소그는 불안한가요. 

   - 뭐, 난…….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식과 감각은 늘 동행하지는 않는다. 란제이는 단순히 알고리즘대로 반문했을 뿐인데 소그는 가슴 속에서 순수한 기쁨이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건 마음에 둔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었을 때의 환희와 비슷했다. 아니, 완전히 똑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란제이가 (소그가 생각하기에) 사적인 질문에 대답하거나, 그에 맞추어 반문할 때마다 소그는 제어할 수 없는 설렘을 느꼈다.

   - 나도 괜찮아. 

   - 다행입니다. 

   - 너하고… 계속 훈련했잖아. 여기서. 

   - 엔지니어 소그는 성실하게 임했으니까요. 좋은 크루가 될 겁니다. 

   - 그렇게 생각… 해? 

   - 네. 

   란제이는 푸른 눈으로 소그를 바라보며 단언했다. 순간 소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하는 어떤 질문에 ‘네’ 라고 대답하는 란제이를 상상하고 말았다. 상상의 여파로 미친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엔지니어 소그? 

   - ……왜?   

   -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한 것 같아서요.

   - 아, 아니. 아무 일 없어. 괜찮아.  

   그때 란제이의 손이 불쑥 소그의 뺨을 짚었다. 소그는 화들짝 놀라 거의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 가, 갑자기…!

   - 체온 확인 중입니다.

   - 그… 그런 거… 필요없… 다니까…   

   소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 점점 높아지는데. 오늘 몇 시간 잔 거죠.

   란제이가 하는 질문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일이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 돼, 됐어!

   소그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겨우 란제이를 힘껏 밀어냈다. 주르륵 밀려난 기계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며 이상이 있으면 이야기해달라고 말했다.   

   ‘미쳤군. 이건 기계야. 사람이 아니라고.’  차가운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어때? 오히려 나쁘지 않잖아.’  동시에 가슴께에서 누군가 어둡게 속삭였다. 

   ‘란제이는 날 거부하지 못해.’

   당연한 사실은 주관 속에서 끔찍하게 뒤틀린다.

   ‘기계니까.’

   소그는 스스로의 저열함에 흠칫 놀랐다.    

 

   TAKE#3

   행성 체류 5일차.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이 행성에 대해선 감탄과 칭찬뿐이야. 당장 배아를 꺼내자는 말에 난 미쳤냐고 했어. 대체 여기가 뭔줄 알고. 뭐가 있을 줄 알고. 정착을 결정하냐고! 결국 실랑이 끝에 행성 전체 탐사를 마친 후에 다시 결정하기로 했어. 

   우주선 위치를 옮기고, 기존 착륙 지점의 반대편 탐사가 이뤄지던 날. 나는 이번에도 란제이와 함께 갔고, 우리 쪽은 별 일 없었어. 돌로 만들어진 신전 같은 건축물을 몇 개 돌아본 게 다였지. 그런데 복귀하려니까 다른 크루들이 하나같이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내가 란제이한테 ‘우리 쪽 통신 문제냐’고 물었지. 란제이는 ‘그런 것 같다’고 했어. 이 구역에 통신 방해 전파가 느껴진다고. 생명체가 하나도 없는 행성인데, 방해 전파는 대체 누가 보내고 있단 거야? 

   어쨌든 통신은 복구해야 하니까 주변을 좀 살폈는데, 근처에서 전파 송수신기를 발견했어. 이상한 건 너무 익숙한 물건이었단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수리해본 적 있는 기종이었어. 그러니까, 지구 물건이었다고. 그것도 몇 년 안 된. 

   여긴 생명체가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렸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더니… 후드를 눌러쓴 남자 한 명이 서 있었어. 분명 아무것도 없던 신전 안쪽에서, 꼭 유령처럼. 

 

 제3장

   “설마 전파가 닿았을 줄은. 저도 놀랐습니다.”  

   “네가… 그 메시지를 보냈다고?” 

   “확신을 가지고 보낸 건 아니었지만.” 

   후드를 쓴 남자는 소그와 란제이를 신전 안쪽으로 이끌었다. 소그는 당연히 경계했지만, 통신기 수리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찝찝해하면서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짙은 후드 그림자로 반쯤 가려져 있었는데, 목소리만은 더없이 나긋하고 상냥했다.  

   “여긴 살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데.” 

   “안타까운 행성이죠.” 

   “넌…”

   소그가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어떻게 버텼지?” 

   “의심하실 만도 하죠.”  

   날선 물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한 투였다. 자로 잰 듯 일정한 보폭으로 나아가던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소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 표정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드러난 입매는 분명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긴장하실 것 없어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버틴다는 말 자체가 조금 잘못된 것 같군요.” 

   소그가 포식자 앞에서 몸을 부풀리는 초식동물처럼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는 변함없이 여유로웠다. 그는 천천히 소그의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 훑어내리고, 옆에 선  란제이의 모습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문득 소그는 그가 란제이를 이상할 정도로 자세히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니면 어떤 대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시간을 들여 섬세하게 살피고 있다고. 

   “버틸 필요도 없었어요.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환경이라도 상관 없으니.” 

   “뭐?”

   “저는 안드로이드입니다.” 

   “무슨… 뭐라고?” 

   처음 그 말을 들은 소그는 멍청하게 묻기만 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제 설명이 됐나요?” 하고 반문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는 태양광 발전기를 탑재하고 있으니, 햇빛만 있다면 물과 음식이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그가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머물러 있음에도 새로운 생명체가 생겨나지 않은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소그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저는 블러스트리 사의 안드로이드로, 윈자이 호에 탑승한 보조 승무원이었습니다.”

   “잠깐, 블러스트리 사의 안드로이드는…….”

   “‘란제이’ 한 가지 모델 뿐이죠.”

   그는 다시금 란제이를 집요하게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공개된 것만 따지면.” 

   “그러니까 넌… 미공개 모델이라고?”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의 안드로이드 블러스트리죠.”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블러스트리 사의 첫 인간형 안드로이드는 항공우주국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블러스트리 사는 후원의 대가로 당시 가장 큰 프로젝트였던 윈자이 탐사대에 초기 모델을 지급했다. 베타테스트 겸 탐사 종료 이후 블러스트리 사와 항공우주국은 탐사 결과와 함께 가장 완벽한 휴머노이드의 탄생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불행한 사고로 인해 윈자이 호는 지구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 탓에 블러스트리 사의 초기 모델 또한 역사의 뒤편으로 묻히고 만 것이다. 

   “아버지라면, 완전하지 못한 모델을 공개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아토즈 블러스트리. 제 창조자입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지만 소그는 어쩐지 껄끄러움을 느꼈다. 곧 그들은 신전의 안쪽, 둥근 테이블이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는지 나름대로의 생활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란제이가 먼저 문턱을 넘어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소그가 자기도 모르게 그를 막아섰다.

   “잠깐만.”

   “뭔가요.” 

   “아니, 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먼저 살펴볼게.” 

   “제가 먼저 들어갑니다. 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란제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가로채왔다. 란제이의 말이 맞았다. 인간이 안드로이드 대신 낯선 장소의 안전을 확인하다니. 소그의 말은 상식에서 다소 벗어난 소리였다.  

   “……나도 괜찮아.” 

   “기다리세요.” 

   소그는 고집을 부렸지만 란제이가 더 빨랐다. 란제이는 성큼성큼 기체를 옮겨 안쪽으로 진입했다. “내가 먼저…!” 소그는 언성을 높이려다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이상해 보이는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후드를 눌러쓴 또다른 안드로이드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소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자 어쩐지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뭐, 그렇지. 같이 다녔으니까…” 

   “통신기.”

   “아.”

   “손봐 드리죠.” 

   소그는 귀에서 통신기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전 됐습니다.” 란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엔지니어 소그의 통신기를 수리하고 나면, 저는 남은 부품으로 고칠 수 있을 겁니다.” 더없이 합리적인 이유였지만 소그는 그 말을 배려로 오인했다. 기계는 합리성에 의거해 판단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런 방향의 오해는 막을 수가 없다. 마음이 먼저 앞서 제멋대로 날뛰고 만다. 후드를 쓴 그는 잠깐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통신기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금방 끝날 겁니다.” 

   그가 통신기를 수리하는 동안, 소그를 거친 후드를 쓴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은 모든 의문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블러스트리 사의 첫 안드로이드라는 그것은 어딘가 묘하게 위화감을 주는 부분이 있었다. 어쩌면 란제이를 너무 오래, 너무 자세히 바라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란제이의 자로 잰 듯한 보폭과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비해 그는 지나칠 정도로 나긋나긋하고, 변칙적이었다. 소그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말이야.”

   “네.”

   “여기 불시착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때 인간들은 다 죽었다고?”

   “유감스러운 일이죠.”

   그는 조금 가라앉은 투로 대답했다. “사고였습니다.” 슬픔에 잠긴 목소리가 덧붙였다. “그렇겠지.” 소그는 어쩔 수 없이 안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가끔 그는 안드로이드보다도 더 알기 쉬울 때가 있었다. 타인이 슬퍼하면, 소그는 슬퍼진다. 타인이 기뻐하면, 소그의 마음도 어느 정도 들떠 버린다. 그 감정의 전이는 더없이 주관적이어서, 안드로이드에게조차 안타까움과 동질감을 느끼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래도 기쁘네요.”

   “뭐가?”

   “이렇게 여러분을 만날 수 있단 사실이요.”

   “…뭐, 네가 전파를 보냈으니까.”  

   “혼자서는 더 버틸 수 없었어요.”

   소그는 멈칫했다. 

   “외로웠다는 거야?”

   그는 통신기를 수리하던 손을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그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로 얼굴 반쯤을 가린 채. 그의 얼굴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다만 올라간 입매만은 여전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치직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통신기로부터였다. 

   - 소그, 소그? 란제이! 

   “고쳐졌군요.” 

   “잠깐만. 뭔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다급한 거지? 그 순간, 비명소리가 들렸다.

-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이 괴물은 대체 뭐냐고! 떠, 떨어져. 나한테서 떨어져!  

   경악하는 소리. 겁에 질려 떨리는 외침. 이어서 무언가 떨어지고, 무겁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건 분명히 인간의 살점이 뜯어지는 소리였다. “잠깐, 응답해!” 소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나 통신기 너머에 비해 세 사람이 있는 신전은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무슨 일이… 대답해! 안 들려?!” 

   “아직 발신 기능까지는 수리하지 못했어요.” 

   낯선 안드로이드가 평이하게 말했다. 위급한 상황과 대조적으로 고저없는 목소리는 그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하지만 어쩐지 소그는 그 태도에서도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반응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출력하는 연산장치가 아니라, 꼭… 예정된 일에 즐거워하는 사람 같았다. 

   “발신 위치는! 어디야?!”

   “멀지 않아요.” 

   “말해!” 

   그가 좌표를 보냄과 동시에 소그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란제이는 당연하게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 순간. 육중한 소리와 함께 신전의 문이 양 옆으로 닫혔다. 란제이는 멈칫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소그는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단단한 벽으로 가로막혔다. 

   “엔지니어 소그.”

   란제이가 벽 너머로 소그를 불렀다. 아마 소그도 란제이를 몇 번 외쳐 불렀겠지만, 차갑고 단단한 돌벽은 너무나 두꺼워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란제이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사태의 원인을 찾았다. 후드를 눌러쓴 그는 란제이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이 문, 열어주시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어.” 

 

   TAKE#4

   내가 뛰쳐나간 순간 갑자기 문이 닫혔어. 뒤돌아서 란제이를 불렀지만 아무 소리도 안 들렸고. 그대로 기다릴 수도 없어서, 우선 먼저 좌표까지 뛰어갔어. 그때… 그 모습은, 정말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 말 그대로 지옥이었으니까. 

   피 냄새. 찢어진 살덩어리들… 등이 찢긴 시체들은 하나같이 아는 얼굴들이었어. 전부… 전부 라세하스 호의 크루들이었다고. 구역질이 나는 걸 견디지 못하고 속에 있는 걸 게워내고 난 뒤에서야 깨달았어. 소리가…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소리가 들린단 걸. 

   그것이 달려들기 전에, 나는 미친듯이 뛰어서 도망쳤어. 함선으로 가야 돼. 여길 떠나야 돼. 여긴 우리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여기에서 살고 있던 안드로이드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던 행성과, 생명체라곤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던 풍경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어. 무언가 결론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지배해서… 겨우 몸을 움직이는 건 공포와 본능 뿐이었는데. 

   란제이. 

   란제이! 내 말 들려? 

   미친듯이 달리며 통신기에 대고 외쳤지만 돌이오는 대답은 없었어. 계속…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어떤 대답도 안 돌아왔어…  

   내 말 들리면 대답해. 

   란제이!

 

 제4장

   - 란제이. 내 말 들려? 내 말 들리면 대답해. 란제이!

   란제이의 통신장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러나 발신 장치는 아직 고쳐지지 않았다. 란제이가 무슨 대답을 하고 어떻게 목소리를 낸들, 소그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다. 란제이는 창백하고 무감각한 얼굴로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가 의도적으로 수신장치만을 수리했다는 건 명백했다.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가 봐야 합니다. 문을 열어주시죠.” 

   란제이가 반복했다. 

   “침착해. 할 이야기가 남았다고 했지 않아.”

   둘만 남은 순간부터,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달라졌다. 란제이는 그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후드를 눌러쓴 그는 돌로 이루어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지었다. 

   “뭡니까.”

   “먼저 묻지. 정말 가고 싶은가?”

   “엔지니어 소그가 위험에 처할 겁니다.”

   “아.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라세하스 호의 크루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게 네 용도인 모양이지.”

   란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람에 낙엽이 바스라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차라리 다른 이유를 대면 어때.” 

   “무엇을.”

   “파트너를 지키기 위해 달려가고 싶은 것 아니야?”

   “엔지니어 소그도 라세하스의 크루죠.” 

   “그렇겠지.” 

   란제이의 대답에 그는 대놓고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시하군.”

   “문을 열어주시죠.”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나.”

  “지금 상황에 해야하는 말은 이것 뿐입니다.” 

   “생각을 조금 바꿔 보지 그래. 그가 라세하스 호의 크루가 아니게 된다면, 따라가지 않을 건가?”

   “…….”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아니게 만들어줄 수 있어.”

   “어떻게.”

   “간단해. 우주선을 해킹해서 선원 명부를 조작하면 되지.”

   그는 세상의 규칙이나 정해진 규율 따위가 모두 의미없다는 듯이 말했다. 란제이에겐 입력되지 않은 발상이었다. “외부인이 선원 명부를 조작하는 것은 규칙 위반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해진 대답을 출력했다. 바람 소리 같은 웃음이 한 번 더 들렸다. 

   “란제이라고 했지.”

   “네.” 

   “난 왜 네가 그 인간을 쫓아가고 싶은지 묻는 거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한 것 같군요.”

   “그게 너의 목적이라서? 그건 대답이 안 돼.” 

   어느새 그는 란제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깊게 눌러쓴 후드의 끝자락이 흔들렸다. 이윽고 그는 흰 손가락을 들어 란제이의 맨손을 붙잡았다. 인공 피부가 일말의 끈적함도 없이 맞닿았다. 란제이는 잠깐 흠칫했지만, 그의 머리통을 날리는 대신 반사작용을 억눌렀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란제이의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후드로 가져갔다. 겹쳐진 손가락이 나풀거리는 후드를 벗겨냈다. 

   “…….” 

   “대답이 안 된다고 했잖아.” 

   드러난 그의 얼굴은 단정하고, 정갈했다. 잘 다듬어진 짙은 눈썹과 푸른 눈동자. 매끈한 콧대와 흔들림 없는 턱은 란제이와 오차 하나 없이 똑같았다. “아버지께선 창의력이 부족하시지.” 얼굴을 드러낸 그가 신랄한 투로 말했다. “아들들을 죄다 같은 얼굴로 빚어냈으니 말이야.” 그는 란제이를 옭아맨 손을 풀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란제이의 물음에 그는 굳혔던 입매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럴 생각도 없진 않았어. 혼자는 더 버틸 수 없었다고 했잖아.” 

   “절차를 거치면 안드로이드 한 체는 추가 적재가 가능할 겁니다.” 

   “말은 끝까지 듣도록 해.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어째서죠.” 

   “네 파트너가 데리고 와줬잖아. 소중한… 생명체들을.” 

   그는 ‘네 파트너’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발음했다. 란제이가 그 말의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그는 한 발 앞서 말을 이어갔다. 

   “널 끔찍하게 아끼던데.” 

   “엔지니어 소그는 섬세하시니.”

   “그런 뜻이 아니야.” 

   그는 “알 리가 없겠지만.” 하고 덧붙였다가, “무심하기도 하군.” 하고 감탄까지 했다. 

   “그렇게 티가 나는데, 정작 당사자는 마음을 알지조차 못하다니.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제 문을 열어주시죠.” 

   “이제 그만 미련을 버려. 그는 죽을 테니.” 

   “문을 열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습니다.”

   두 안드로이드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정교하게 세공된 푸른 눈. 흠 하나 없고, 핏줄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하게 매끄러운 구슬의 표면이 자신과 똑같은 상대를 향하고 있었다. 란제이의 눈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반대쪽에 선 그의 눈은 란제이에 비할 바 없이 싸늘했다. 그 차가운 시선에는 일종의 경멸마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너라면 내 이해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가 란제이를 옭아맨 손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하지만 너도 다를 바 없었군.”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반대쪽으로 꺾였다. 

 

   TAKE#5 

   란제이는 대답하지 않았어. 계속 대답이 없으니까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난 다시 신전으로 돌아갔어. 란제이를 데리러. 그 후드 쓴 안드로이드 자식이 무슨 일을 한 게 분명하다는 예감이 들어서, 신전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졌고.

   다행히도 돌아가니 벽은 열려 있었어. 불행한 건, 그 안에 안드로이드 한 체가 망가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단 거야. 그 안드로이드는 란제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나는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어. 그 때, 내 어깨에 누군가 차가운 손을 얹었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란제이가 서 있었지. 

   란제이.

   란제이는 ‘엔지니어 소그. 괜찮습니까?’ 라고 물어왔어.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더군. 난… 란제이가 부서져 버린 줄로만 알고. 내가 없는 사이에 죽어버린 줄 알고 별 생각을 다 했는데. 란제이는 그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과정을 설명하고, 그와 나눈 대화 몇 마디를 내게 알려줬어. 불길한 예감이란 왜 틀리지 않는 건지. 나는 란제이에게 괴생명체에 대해 설명했어. 그러니까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란제이도 동의했지. 

   ‘어서 가죠.’  

   란제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한테 손을 내밀었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순간. 아주 작은 위화감이 내 발끝에서부터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어. 대체 왜? 이유도 알 수 없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위화감은 작은 벌레처럼 날 신경쓰이게 했지만… 하나하나 파고들 여유는 없었어. 

   그래. 가자. 

   나는 그 손을 잡고.  망가진 기체를 넘어… 달려나갔어. 

   산 사람이라곤 아무도 남지 않은 함선을 향해서.  

 

 제5장 

   함선까지 달려가며 소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행성은 부드럽고 따스한 정착지가 아니다. 이곳은 아가리를 벌린 채 생명체를 유혹하는 덫이었다. 행성 곳곳에는 인간의 등을 찢고 태어나는 괴생명체의 알과 유생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거대한 배양소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라세하스 호의 선원들은 그들을 태어나게 하는 도구로 쓰였다. 아마 불시착했다는 윈자이 호의 선원들도 같은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중요한 게 하나 빠져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외계 생명체’, ‘윈자이 호’, ‘불운한 사고’, ‘몰살’... 이 모든 키워드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생각하기보다 몸을 먼저 움직여야 했으므로, 소그는 머리를 굴리는 대신 발을 움직여 겨우겨우 함선에 올랐다.

   “문, 문 닫아!”

   “네. 엔지니어 소그.” 

   란제이가 함선의 문을 닫았다. 무거운 문이 닫히자, 끽끽거리던 괴생명체의 울음소리도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소그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생명의 위협이 사라지니 곧이어 막을 수 없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이제 이곳에 소그 외의 인간은 없다. 창고에는 배아가 실려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말도 할 수 없는 세포 덩어리일 뿐이었다. 한순간에 모두가 죽어버렸다. 행성 플레어에 의해 크루의 절반이 사망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큰 절망이 소그를 내리눌렀다.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압박감은 두 배가 되었다. 

   “……엔지니어 소그?” 

   그때, 란제이가 다시 소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그는 흠칫 놀랐지만 그를 떼어내지는 않았다. 

   “그래.”

   “괜찮으신가요.” 

   “…난 괜찮아.”

   “안색이 안 좋네요.”

   “그건…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야.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자동 운전 모드를 켤 테니까. 여긴 위험해. 당장 여길 떠나야 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란제이는 선뜻 나서서 소그를 도와 계기판을 움직였다. 다행히도 라세하스 호는 뛰어난 자동 운전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레버를 몇 개 내리고 버튼을 조작하자, 우주선은 알아서 비상 모드로 돌입한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제서야 한숨 돌리게 된 소그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내리눌렀다. 

   “마실 걸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됐어. 괜찮아. 그보다… 그냥.”

   소그가 충동적으로 란제이의 팔을 끌어당겨서 옆에 앉혔다. 란제이는 묵묵히 그의 손길에 따랐다. 소그는 시선을 움직여 차갑고 완벽한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기계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든 억눌러왔던 지난날이 의미없이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지치니,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냥 여기 앉아 있어.” 

   소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란제이는 무기물로 만들어진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죠.”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프로그래밍된 반응과 프로그래밍된 답변. 소그는 그 점에 공허감과 충족감을 함께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을 좀 붙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란제이가 차가운 손을 들어 소그의 눈을 덮었다.

   “자, 잠깐.”

   소그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싫으신가요?”

   란제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 손은 여전히 소그의 눈을 가린 채였다.

   “싫다는 게 아니라…”

   소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뻘뻘거렸다. 차가운 기계의 손이 닿았을 뿐인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소그는 진정하기 위해 안감힘을 썼지만 맥박은 점점 빨라졌다. 그 사이 란제이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소그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금방 나아지실 겁니다.” 

   “너, 무슨…….”

   “좋아질 테니까.” 

   그때, 지금껏 생존을 위해 뒤로 미뤄뒀던 모든 의문과 단서, 조각들이 맹렬하게 모이기 시작했다. 외계 생명체, 윈자이 호, 불운한 사고, 몰살. 거대한 배양소, 망망대해에서 라세하스 호에 닿았던 전파, 유달리 깨끗했던 신전. 수신 기능부터 수리되었던 통신장치. 닫혔던 문. 가로막힌 벽. 그 너머에 있던 란제이. 그리고… 블러스트리 사가 만든 최초의 안드로이드. 

   그는 지금껏 이 행성에 머물렀다지 않았나? 

   왜 윈자이 호 선원들의 최후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지? 

   만약,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면. 모든 걸 알고도 나를 밖으로 보내고, 란제이와 나를 분리시킨 거라면. 그렇다면……  

   란제이는 어떻게 된 거지? 

   그 모든 것이 짜맞춰진 순간, 소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란제이의 손을 뿌리쳤다. 란제이의 손은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투명하고 푸른 눈으로 소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소그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왜 그러시죠.” 

   “…….”

   “맥박이 빨라졌고, 근육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 신체 반응으로 봤을 때.” 

   “너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군요.”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뿌옇게 흐려졌던 유리판을 닦아낸 것마냥 정신이 맑아졌다.

   “너는…… 란제이가 아니야.”

   초점이 흐렸던 장면들이 이제서야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의 모든 행동은 란제이와 달랐다. 결코 같지 않았다. 그들이 같게 만들어진 건 골격과 외피 뿐, 내부를 이루는 그 어떤 시스템조차 같다고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소그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란제이의 유니폼을 입은 그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굴렸다. 

   “모르는 게 좋았을 거야.” 

   “닥쳐. 너… 란제이를 어떻게 한 거야!”

   “알지 못했다면, 계속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랬다면 꽤 행복했을 걸. 나는 네가 바라는 모든 걸 해줄 수 있으니까.”

   그는 다시 딱딱한 얼굴을 하고는 손을 뻗어 소그의 뺨을 덮었다. 그 모습이 란제이와 너무 닮아서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미소지었다. 

   “봐. 지금도.”

   “…….”

   “네가 바라는 건 이런 거잖아.”

   “입 다물어….”

   “그 녀석은 이런 걸 해주지 못하지. 나 이후로 아버지는 회로를 뜯어고쳤으니까. 더 무기물에 가까운 형태로. 아무 생각도 스스로 하지 못하도록. 감정을 제거하고, 생각의 알고리즘을 단순화시킨 거야. 그러니 평생 그 녀석이 네 마음을 이해할 일은 없어.” 

   그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쩐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쪽 손을 소그에 뺨에 얹고, 나머지 한쪽 손으로 소그의 허벅지를 짚었다. 쇠와 전선으로 이루어진 게 분명한 몸뚱아리인데도 소름끼칠 정도로 부드럽고 유연했다. 

   “나라면 네 이해자가 되어줄 수 있어.” 

   “…….”

   “네가 아끼던 것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건 어렵지 않아. 얼마든지 착각하게 만들어 줄테니,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대가는 단 한 가지.”

 소그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매끄럽게 말을 이어갔다. 

   “간단해. 눈만 감으면 돼. 그러면… 네가 바라는 걸 주지.” 

 같은 엔진을 사용한 같은 목소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의 얼굴은 란제이의 얼굴과 같고, 그의 목소리와 속눈썹 손끝 하나까지도 란제이의 것과 동일하다. 기계를 사랑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사실을 소그는 끊임없이 되뇌어왔다. 하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차라리 미친 사람이 되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열망.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 혼자 싸워왔던 날들. 

   그 모든 것들을… 눈앞의 그는 알고 있다. 

   눈앞의 그에게는 감출 필요가 없다. 

   소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붉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은 무의미한 저항을 그만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치켜올렸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소그의 뺨에 얹은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여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그 순간. 

 

   TAKE#6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 이제 이 함선엔 아무도 남지 않았는데. 란제이만은 내 곁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어. 난 란제이를 그 행성에 놔두고 와버렸다고. 산산조각난 채로. 부품조차 모으지 못했어…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건, 란제이와 같잖아. 

   란제이처럼 말하고, 란제이처럼 움직일 수 있잖아. 란제이처럼 행동할 수 있잖아. 내가 어떤 일을 해도… 나를 받아들여 줄 거야. 그에겐 내가 필요하니까. 내가 눈감아주기를 바라니까. 

   그래서 나는. 

  

 제6장

   우득. 

   입맞춤에서는 결코 나지 않을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이 형편없이 꺾였다. 푸른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소그가 더 빨랐다. 소그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목을 한 번 더 비틀었다. 이 부분의 기체는 유달리 약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꺾을 수 있었다. 

   곧 우드득,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목이 완전히 돌아갔다. 이윽고 동력을 잃은 장신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그제서야 소그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지러웠다. 소그는 벌벌 떨며 몸을 일으키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애쓰며 바닥에 누운 그를 확인했다. 동력은 완전히 나갔고, 목은 부러졌다. 동력이 복구되더라도 몸을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차가운 구슬로 만들어진 눈은 이제 완전히 무기물로 달아가 있었다. 소그는 그 눈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는… 내가 바라는 걸 줄 수 없어.”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누구라도 똑같아….”

   란제이가 소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사랑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어, 걷잡을 수 없이 그 크기를 불려간다는 것을. 사랑이 언제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사랑은 합리적인 선택을 방해하고, 선명한 행복을 손에서 떨어뜨리게 한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이 마음은 보답받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란제이와 유사한 그 역시도, 소그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소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온기 없는 실리콘 피부를 쓰다듬었다. 

   그와 란제이가 달라서가 아니라… 동일하기 때문에. 

   이윽고 소그는 고개를 숙여, 돌아간 목에 입을 맞추었다. 

 

   TAKE#7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이제 이 함선에 생존한 개척민은 나밖에 남지 않았어. 항해를 보조해줄 안드로이드도 없지. 운이 좋다면 후보 행성에 닿을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행성 플레어에 휘말려 개죽음을 당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그걸로 끝인 거지. 이 넓은 우주에서 부서진 함선 하나가 발견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하지만 이 행성과 윈자이 호, 안드로이드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든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거야. 지금은 아무도 듣지 못하더라도, 몇백 년 뒤 우주를 떠돌다가 누군가에게 닿을지도 모르니까. 만약 누군가 듣는다면 개죽음 당한 윈자이 호와 라세하스 호를 기억해 주기라도 하겠지.

   이 기록이 언제 전해질지, 누구한테 전해지기는 할지… 모든 게 불확실하지만. 

   딱 하나… 진심으로 바라는 게 있어. 

   이 우주 속에서 다시 한 번만. 

   너를 만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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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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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

Gu San

데밋, 생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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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휘

Namgung H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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