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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

Captain America: The Winter Sold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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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136분

액션 · 모험 · SF

100년간의 냉동 수면을 끝낸 트루스. 그는 현대 생활에 적응해 살아가며 위협과 맞서 싸우고,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출을 받고 나간 현장에서 죽은 줄 알았던 전우 글로나스가 윈터 솔저가 되어 돌아온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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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해주셔서 감사해요, 트루스 씨.”

   모던하게 꾸며진 박물관 안. 큐레이터가 모자를 쓴 남성에게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트루스라고 불린 남자는 잠시 멋쩍게 웃었다. 정말 창피하군.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모자를 잠깐 벗었다 쓰며 마주 인사했다. 잠깐동안이었지만 붉은 머리카락이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날렸다. 실내가 건조한 탓이었다.

   그는 붙임성 있게 말했다.

   “하하… 민망한데.”

   “어제도, 오늘도,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주셨어요.”

   “그런가? 그렇군.”

   트루스는 큐레이터의 대답에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이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다. 직원의 말대로 전시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전시품을 관람하고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의 손님이었다.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올 일인가……. 트루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니컬한 의견일 수도 있겠지만, 트루스는 정말로 이 전시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전시관의 테마가 ‘자신Truth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유리로 된 진열장 안에는 약 100년 전 전쟁의 흔적이 전시되어 있었다. 부채꼴 모양의 조명은 군복이나 총기 따위를 밝게 비췄는데, 그건 전부 자신이 실제로 입고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 옆에는 자신의 연혁을 기록해둔 연표가, 홀로그램 실루엣이, 안내 동영상이 위치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낱낱이 파헤쳐져 전달된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ASMR을 듣는 것처럼 익숙하게 동영상 속 음성을 듣고 흘리곤 했다. 내용은 트루스 자신도 놀랄 만큼 상세했다.

   관찰하던 트루스는, 가까이 있는 연표로 다가가 찬찬히 훑어보았다.

 

   19XX년 5월 24일 출생.

   .

   .

   .

   19XX년 6월 XX일 입대.

   19XX년 7월 XX일 상사 진급.

   19XX년 7월 XX일 특수부대 파견.

   .

   .

   .

   2022년 6월 XX일 동면 해제.

   단순한 문자와 숫자의 나열임에도 마음이 오묘해졌다. 괜히 과거를 반추하게 되니 어쩐지 쓸쓸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연표의 대부분을 함께했던 동료들은 전부 세상을 떠나고, 지금의 트루스는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잠든 사이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기에 동료들의 사망은 자연스러운 이치일 테지만... 그저 잠들었다 일어난 입장인 트루스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기도 했다.

   ‘체르노미르딘 중사는 트루스와 가장 절친했던 전우로…….’

   스크린에 흑백으로 누군가의 사진이 띄워졌다. 단정한 숏컷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외모를 지닌 남자는 100년 전에도 후에도 충분히 미남으로 불릴만한 사람이었다. 얼굴 밑에 자막이 띄워졌다. <글로나스 A. 체르노미르딘 중사. 19XX년 3월, 작전 백조의 호수 수행 도중 전사.> 

   트루스는 잠시 화면의 불빛을 눈에 담다가, 이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자리를 떴다. 

   전시관을 급하게 빠져나온 트루스가 찾은 곳은 흡연 부스였다. 내부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트루스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잠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사실 우스운 꼴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굳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이런 식으로 전시돼 선전에 이용되고 싶지도 않았고, 허락한 적도 없었다. 트루스가 강화 혈청을 맞은 이유는 다만 자신의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과연 많은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걸까... 이 전시관을 지을 돈으로 차라리 기부를 하는 게 나았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불을 붙이고, 담배를 빨아들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쳤다. 연기 속 화학물질은 그의 시니컬한 태도를 차츰 깎아내기 시작했다. 생각이 단순해지고 나서야 트루스는 다시 한 번 영상 속 안내 음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체르노미르딘 중사는 트루스와 가장 절친했던 전우로…….’ 

   ‘작전 백조의 호수 수행 도중 전사했습니다.’

   글로나스는 죽었다. 살아 있어도 이상하리라는 걸 트루스도 알았다.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하게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못다한 말이 많았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트루스가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많은 이유 중에는 글로나스도 언제나 포함되어 있었다. 트루스는 글로나스에게 제대 이후를 약속했고, 그의 눈색을 가장 나중에 잊을 것이라 맹세했다. 글로나스 역시 흔쾌히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트루스는, 잠에서 깨어나서도 글로나스를 찾지 않았던 거다. 그의 죽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그 현실과 직면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글로나스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어딘가에서 살아 있거나, 그렇게 살다가 평화롭게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지구엔 여전히 수많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트루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부름에 성실하게 응하다보면, 몹시 사랑했던 사람도 종종 떠올리지 않게 된다. 그렇게 트루스는 일로써 글로나스를 잊어나가는 것이다.

   “트루스 로 상사.”

   바로 지금처럼.

   “호출 응답 바랍니다.”

   착용하고 있던 워치에서 응답 호출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워치 액정에 숫자 여러 개가 떠올랐다. 목적지의 좌표값일 것이다. 트루스는 워치의 버튼을 누르고 통신을 연결했다. 다급한 목소리가 트루스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브루클린 브릿지 상층, 얼굴을 가린 괴한이…….’ 음성은 추억보다 더 중요한 곳에 자리잡아 그의 신경을 고정시켰다. 이렇게 트루스는 글로나스의 죽음에 애석해하다가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응답하곤 한다.

   “그래. 지금 갈게.”

 

* * *

 

   꽤 먼 거리였음에도 트루스는 단숨에 브루클린 브릿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드에서 보급해준 비행 수트와 맑은 날씨 덕분이었다. 오래된 브루클린의 나무 다리는 수십 번의 유지 보수 공사로 절반 넘게 철골로 교체된 상태였다. 게다가 트루스가 도착할 즈음엔 이미 다리의 일부는 파괴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트루스는 다리의 한쪽 끝, 뉴욕 테러대책본부가 자리잡은 진영에 사뿐하게 착지했다. 방탄 차량으로 통제된 그곳에는 군인들이 사주경계하며 자리를 지켰다. 트루스가 도착하자 장교급으로 보이는 군인이 다가와 그에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적은 하나. 트럭 운전수로, 검문을 피해 다리까지 트럭을 몰고 왔습니다. 무력이 평범한 일반인의 것은 아니며…….” 그는 말하며 반대쪽 다리 끝을 가리켰다. 새까맣게 칠해진 화물 트럭이 다리의 맞은편 도로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트루스는 알겠다며 OK 사인을 취했다. 일반인이 아니라면 과학의 힘을 빌렸든, 초능력의 힘이든 맞부딪히지 않는 이상 정확하게 전력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허벅지에 걸어둔 나이프를 고쳐쥐었다. 비브라늄으로 만들어진 칼날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군인들은 기대하는 눈으로 트루스를 바라보았다. 개중 누군가는 “이제 됐다!”며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

   차근차근 다리의 도로를 밟아 나아가자, 멀리 새까맣게 코팅된 대형 화물 트럭 한 대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 앞엔 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트루스는 직감했다. 저 사람이군. 그가 여유롭게 다가가자 상대 역시 라이플을 중세시대 검처럼 단단하게 쥔 후 트루스 쪽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좁아지면 남자의 모습이 더욱 정확하게 보였다. 어두운 컬러의 옷은 코듀로이 재질로, 방수와 보온에 적합해 보였다. 겉면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었는데 수가 꽤 많았고, 버클 벨트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군복을 기능적으로 개조한 옷이었는데, 바지의 구조가 꽤 특이했다. 무릎 아래로 천이 아니라 금속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호스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 의족은 너무 플렉시블해서 보조 기구가 아니라 단순히 방어 장비처럼 보일 정도였다. 

   서로의 키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트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트럭 안에는 뭐가 있는 거지?”

   질문에 남자가 깔끔하게 대답했다. 

   “EMP 폭탄.” 

   그는 얼굴을 마스크와 안대로 가려 한쪽 눈만 내놓고 있었는데도, 목소리만큼은 막히지 않고 또렷했다. 트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좋아. 대답이 예상되지만 한 마디만 더 하지. 차량을 넘기고 돌아가.”

   “…….”

   남자는 라이플에 장착된 칼을 당겨 꺼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트루스 역시 그 행위의 의미를 이해했다. 명백한 거절. 트루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자신의 나이프를 쥐고 남자를 향해 겨눴다. 잠깐의 정적. 두 사람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다가, 거의 동시에 상대를 향해 뛰어들며 맞부딪혔다.

   “......!”
   챙, 챙!

   무거운 금속끼리 충돌하며 강한 충격파가 일었다. 두 사람은 멀쩡했지만 데미지를 입고 파손된 다리가 무섭게 흔들렸다. 트루스도 글로나스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몇 번을 더 경합했다. 두 사람의 무기가 빈틈없이 마주 닿았다. 마치 전투보단 기계 부품이 맞물리는 것과 비슷한 그림이었다.

   ‘도대체…!’

   트루스는 당혹스러웠다. 단순히 ‘강한 적’들은 많았다. 거대한 기계 병기나, 초능력을 쓰는 외계인에 비하면 눈 앞의 남자는 상대할 만한 수준이니 말이다. 그가 놀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 기시감은 뭐지.’

   남자의 움직임이 너무 익숙했다. 남자가 자신을 막아내는 것도, 자신이 남자를 막아내는 것도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트루스가 왼쪽 팔로 파고들면 남자는 오른쪽 팔로 방어했고, 그대로 남자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라이플 나이프로 찌르길 시도할 때, 트루스는 유연하게 허리를 젖히며 궤적을 회피했다. 마치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상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까. 트루스는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마스크와 안대로 가려진 얼굴은 쉽사리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은 커녕 이목구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넌…….”

   “.......” 상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넌……. 누구야?”

   트루스는 생각했다. 머리는 떠올리지 못해도 몸의 반응이 이야기한다. 분명 일전에 칼을 맞대본 적 있는 적일 테다. 트루스의 목적 리스트에 하나의 항목이 더 추가됐다. 적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막고, 적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목적이 더해지자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제압을 위해 몸통 위주로 공략하던 트루스의 팔이 점차 상대의 얼굴로 향했다. 마스크든 안대든 벗겨낼 작정이었다. 상대도 그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더욱 적극적으로 트루스를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트루스가 방어하지 않으니 유효타가 늘었다. 이유를 모르는 상대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다. 남자는 의족으로 트루스의 다리를 강하게 후려찼다. 신경이 상체에 쏠려 있던 트루스는 다리를 직격으로 얻어맞고 그대로 무겁게 나자빠졌다. 다리의 아스팔트가 쿵, 하고 울리며 표면에 금이 갔다. 상대는 그대로 라이플 끝으로 트루스를 찍어누르듯 강하게 총을 내리꽂았다. 트루스가 한쪽 팔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냈다. 수트 사이로 칼날이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팔에 칼이 꽂힌 채로 트루스는 힘주어 강하게 상대의 안면을 가격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마스크가 벗겨졌다.

   맨얼굴을 마주한 트루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첼?”

   글로나스 알빔 체르노미르딘. 트루스와 가장 절친했던 전우이자, 작전 백조의 호수 진행 도중 사망한 군인. 비록 머리는 허리까지 길어졌고, 얼굴을 포함한 온몸의 살갗엔 각종 흉터가 새겨져 있었지만. 트루스는 확신했다. 상대가 글로나스라고.

   트루스의 호명에 첼이라고 불린 상대는 흠칫 놀란듯 몸을 굳혔다. 트루스는 더욱 완고하게 말했다.

   “첼. 너지? 네가 왜…”

   “아니, 아닙니다. 아니야. 나는…”

   그는 머리를 붙들고 괴로워했다. 말투 역시 혼란스럽게 섞였다. 그중엔 글로나스의 것도 있었다. 트루스는 그런 남자의 팔을 잡고 말리듯 진정시켰다.

   “괜찮아. 첼. 진정해. 나는 널 해치지 않을…….”

   트루스의 말은 채 끝마쳐지지 못했다.

   “비켜!”

   글로나스가 트루스를 강하게 밀쳐냈기 때문이다. 엄청난 힘에 트루스는 그대로 날아가듯 밀려나 다리의 외벽에 처박혔다. 하지만 트루스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사람마냥 곧장 일어나 글로나스에게로 뛰어왔다.

   “첼!”

   이름을 불릴 때마다 남자는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몹시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난 그런 이름은 몰라. 모른다고!”

   “그럴 리가, 첼. 네가 가장 좋아하는 호칭이었잖아. 기억해!” 

   트루스가 윽박지르자 남자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신음했다. 

   그러더니 곧 다리 밖으로 몸을 날렸다. 붙잡히기 전에 도주하기 위해서였다.

   풍덩!

   그 소리를 끝으로 글로나스는 이스트 강의 깊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적이 사라지자 군인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다리 중앙으로 달려왔다. 한 팀은 트루스를 엄호하고, 한 팀은 글로나스가 몰고 온 트럭으로 접근했다. 의무병은 트루스의 상태를 물었다.

   “.......”

   트루스가 답하지 않자 의무병은 멋대로 그의 팔을 가져가 상태를 살폈다. 트루스는 저항하지 않고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항할 수 없었다. 깊은 상념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첼은 왜…….’

   글로나스는 왜 살아 있는 걸까. 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타나서, EMP 폭탄이 든 트럭을 몰고, 뉴욕으로 향했던 걸까. 그리고 왜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내가 이름을 부르면 괴로워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걸까. 사실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걸 꼽자면 아마, 자신처럼 혈청을 맞고 냉동되었단 가설일 테다. 그 주체는 현재로선 미지수이지만, 글로나스를 병기처럼 마음대로 다루기 위해 세뇌를 가했겠지. 거기까지 사고를 끝낸 트루스는 영혼이 어딘가로 빨려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몰랐던 때가 나았어. 차라리 그가 죽은 줄 알고 있던 때가 나았다니까…….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상태를 경과 관찰하던 의무병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트루스 상사님. 트루스 상사님, 괜찮으십니까?”

   “.......”

   트루스는 답하지 않고 한참동안 고민에 빠져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마치 아주 대단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빈 말로도 발견의 기쁨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끔찍하게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갑작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마주한 의무병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봐, 닥터.”

   “예.”

   “글로나스의 눈 색을 봤나?”

   “예, 아니, 갑자기 그런 질문을…”

   못 봤습니다. 의무병이 덧붙였다. 그러자 트루스는 허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분명 가장 나중에 잊을 거라고 맹세했는데…”

   “예?”

   의무병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트루스는 허탈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글로나스의 움직임은 전투를 겪었음에도 날렵해 보였으니, 깊은 강물에 빠져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트루스는 그 사실에 잠깐 안도하며 눈을 깜빡였다. 이스트 강이 멀리서부터 반짝이며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저렇게 맑은 물빛이던가, 아니면 반사되는 햇빛처럼 따뜻한 색이었던가. 억지로 기억을 붙잡고 짜내도 확답이 나오진 않았다. ‘영원은 없지만, 평생을 약속할게. 그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네 눈색만큼은 기억할게.’ 이제는 의미 없어진 맹세만 머리에 맴돌 뿐. 잊었으니 마지막에 도달해버린 걸까. 글로나스도 이 맹세를 떠올릴까. 그렇다면 상처받을 거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트루스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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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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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스 로

Truth Lowe

검황, 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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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나스 A. 체르노미르딘

Glonass A. Chernomyr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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