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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Snowpier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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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126분

SF · 디스토피아 · 포스트 아포칼립스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이바노프와 율리야는 그 궤도에서 내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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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처럼 달력을 넘겨보지 않아도 이곳 사람들은 한 해가 지나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시간은 물성이 없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인간은 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잡아 알고자 했다.

   만년을 갈 눈이 두텁게 쌓인 설국을 영원히 가로지를 열차는 지구 한 바퀴를 도는데 꼬박 일 년을 썼다. 열차의 속도는 딱 세월만큼 일정하다. 인류의 둥지를 달력으로 쓰자면 못할 것도 없다는 의미다.

   옆에 바짝 붙어 걷던 동행인의 다리가 멈췄다. 이바노프 역시 자연스럽게 정지해 옆을 내려다보았다. 홍조가 오른 뺨 위로 채 굳지 않은 피가 느릿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가 흘린 피가 아님을 이미 알아도 이반은 심장이 쿵 뛰는 것을 막지 못했다. 누군들 피투성이에 너덜너덜한 꼴인데도 율리야는 평온한 태도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흰 풍경은 이바노프에겐 사시사철 똑같게만 느껴지지만 율리야는 그 풍경들을 구분할 줄 알았으므로, 아마 지금도 한결같은 풍경에서 특별함을 찾아내고 있으리라. 이바노프는 그 관찰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전투를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휴식이 필요할 터였다.

   그들은 기차의 머리로 향하고 있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가능성 낮은 일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을 알아야만 한다. 이 열차 내에서 머리와 꼬리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흔히 꼬리는 잘려 사라져도 별문제 없을 부위로 여겨졌다. 도마뱀이 생존을 위헤 제 것을 버리고는 하듯이. 세상이 망하고 방주로 몰려든 사람들은 빠르게 세계를 구축했고, 지구에 쌓아 올렸던 기술과 진보가 한순간 사라져 자연으로 돌아갔듯 기차 내에서는 몰락했던 계급이 부활했다.

   지배층이라 불리는 머리 칸에서는 기차의 말단 후미에 ‘가장 가치 없는’ 이들을 몰아넣었다. 공간과 자원이 한정적이니 사람의 쓸모를 갈라 만든 박정한 세상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앞쪽으로 전진하기만을 원하지 자처해 꼬리로 나동그라지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정정하자면, 거의 없었다.

   언젠가 이바노프의 부모가 러시아의 눈 덮인 땅을 밟고 살다 환난에 떠밀려 기차로 달려 올라갔듯 세상은 가끔 뒤집히고 제 발로 보금자리를 걷어차고야 마는 날이 오고는 했다. 기억 대부분이 기차에서의 삶으로 도배된 이바노프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감각이었으나. 율리야 파기모브나 오르바카이테가 머리 칸을 버리고 기차를 역행하기로 결심한 날 덩달아 이반의 세계는 앞뒤가 바뀌고 위아래가 뒤집혔다. 부모님의 말씀이 맞았다. 세상은 가끔 뒤집힌다. 제 발로 보금자리를 걷어차게 되는 날이 있다. 목적지가 어디가 되었든 이바노프는 율리야를 뒤쫓고만 싶었으므로.

   머리에서 꼬리로, 꼬리에서 다시 몸통으로. 율리야와 이바노프는 기다란 열차를 길게 걸었다. 떨어지는 건 쉬워도 오르기는 어려웠다. 꼬리 칸의 비쩍 마른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두 사람을 쫓고 있을 터였다.

   이바노프와 율리야만 먼저 빠져나와 길을 트기로 한 것은 그들이 이미 앞을 알기 때문이었다. 알면 대비할 수 있다. 익숙한 공간에서 조금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여긴 판단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두 사람은 매 순간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머리 칸에서 자발적으로 추락한 이들을 경계하던 이들도 승기를 끌어온 주역들에게 제법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칸과 칸을 구분하는 두꺼운 쇠문을 뚫고 나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누군가 무어라 말한다. 율리야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것을 따라 읊었다. “예카테리나 다리 통과…….” 수를 거꾸로 세는 소리도. 십, 구, 팔, 칠……. 창밖에서 무엇을 그리 찾나 했더니 다리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카테리나 다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열차 내에서 예카테리나는 새해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고는 했다. 그 다리를 통과하는 때 한 해가 지난다. 머리 칸의 사람들은 이럴 때면 늘 하던 것을 멈추고 샴페인 잔을 든 채 수를 거꾸로 세며 새해가 오기를 기대했다. 지금도 그럴까.

   꼬리 쪽으로 향하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터다. 머리 쪽으로 향하면 겁먹은 채 몇 칸의 공간을 버리고 달아난 사람들이 두려운 얼굴로 뒤를 힐끗대고 있을 거고. 어느 쪽이든 열차가 덜컹이는 소리에 묻혀 멀어졌다.

   “…삼, 이, 일.”

   “해피 뉴 이어, 율리야.”

   “해피 뉴 이어, 이바노프.”

   그들은 전진하고 있다. 해가 바뀌고 미래가 온다.

   율리야의 뺨에 묻은 피를 이바노프의 엄지손가락이 훑어 지워냈다. 단단하게 굳은 손가락은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붉은 기가 남은 뺨 위로 입술이 사붓하게 내려앉았다. 이바노프는 미약한 죄악감마저 느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가 명백했다. 머리를 박차고 나오던 순간부터 그랬다. 추락을 인지했음에도 곁에 이 여자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건넨 새해 인사는 다른 소리들과 마찬가지로 두터운 쇠문을 넘지 못할 것이다. 둘만의 비밀로 잠들 테고, 이바노프는 그게 좋았다.

   좁은 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철로 된 심장이었다. 율리야는 머리와 꼬리, 뱀으로 비유되는 이 기차의 시작을 수없이 상상해 보곤 했는데, 이곳은 그 많은 경우의 수중 어느 하나와도 닮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피도 살도 없이 그저 살풍경한 곳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낯설다.  

   몸을 돌려 주변을 살피면 창문은커녕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 보인다. 무겁게 쌓인 눈뿐이 아니라 당장 철문 밖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음을 천천히 실감한다. 그러다 시야에 걸리는 것은 자신과 구별지어진 삶을 가진 타인이다. 

   “이제 거의 다 왔군요.”

   “너무 멀리 돌아왔어요.” 

   그럼에도 그 모든 길이 필요했음을 시인하는 눈이다. 율리야는 그 눈을 바라보며 갈 곳 잃은 손을 달싹인다. 그럼 문제를 알아차린 듯 내려앉을 곳을 내주며 머리를 기대온다. 율리야는 잠시의 휴식에도 열차가 멈추는 꿈을 꾼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제대로 된 역이 있어, 다 같이 짐을 내리고 그리운 얼굴을 마중하는 꿈. 하지만 꿈에서 깨는 것 역시 익숙하다. 

   “이바노프, 이제…”

   입을 떼면 문득 겹치는 것은 갑자기 시끄럽게 돌아가는 엔진 소리다. 꼭 그 소리가 머리칸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렸다. 우리가 그리는 영원은 다른 사람의 평생을 소모로 여긴다. 정해진 단일의 길과 앞으로 나가기 위한 힘이 있다면 주변을 살필 필요는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엔진은 영원하다!  그 울림은 차를 놓친 사람처럼 금방 아득해진다. 기관사를 잃고 부품을 잃고, 그저 작은 고장으로 일어난 소리지만 지금만큼은 타인의 삶을 먹고 살아온 괴물같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언젠가는 그런 삶을 그저 받아들였으나, 그것이 끔찍해진 것이 자신에 대한 인간의 증명이자 타인에 대한 이해의 증명이라 여기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어본다. 손에 불과 총알이 모든 걸 뒤집을 준비가 됐다는 것처럼 들려있었다. 이바노프와 율리야 모두 자신이 하기를 자처했기에 결국 두 사람 모두의 일이 되었다. 

   둘은 인화물질인 크로놀을 곳곳에 붙이고 성냥 대신 무겁게 들린 총으로 커다란 소리를 낸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지겹게 들었던가. 탄환이 나가면 영원할 것 같은 부품 하나를 당장 엉망으로 만들고야 말겠지. 그 엉망이 다른 곳으로 튀어나가 병처럼 번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밖으로 비집고 나간 우리 역시 병처럼 세상으로 내몰릴지도 몰랐으나… 함께라는 생각을 우선할 뿐이었다.  

 

   천지를 개벽하는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와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움직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눈을 뜨면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딘가 흐르는 피 냄새도 잠시 섞였다 부는 바람에 모두 씻긴다. 기억은 후각에서 시작한다는 사소한 지식이 스친다. 언젠가 타는 냄새에 오늘을 떠올리게 될지도, 아니면 다시 피 흘릴 날에 오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두 손의 온기와 그것을 앗아가는 추위가 동시에 느껴지는 것으로 서로가 아직 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도착했군요.”

   “불시착은 아니길 바랍니다.”

   “이렇게 험하게 도착했는데도요.”

   “언제나 그랬죠.”

   걸음 하나마다 느껴지는 것은 추위보다 이 땅의 광활함이다. 기차와는 다른 폭과 높이와 거리가 어느 방향이라도 좋다는 것처럼 우리를 맞이한다. 어느 것 하나 흔하지 않은 자유에서 느끼는 환희보다 옆에 이바노프에 안심하게 되는 것은 증명과 이해와도 거리가 멀었다. 

    “율리야!”

   가까스로 눈에 잡아먹히지 않은 소리에 앞을 본다. 하얀 배경에 익숙한 모습 보인다. 만난 이후로 이렇게 서로 멀어진 적 없던 사람이다. 두고 간 것이 아니라 그저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 것처럼 놀란 눈. 멀리서 보이는 색이 글귀에서나 보던 오렌지 나무를 상상하게 했다.

   지구의 중력은 어느 곳에서나 공평하지만 높이 쌓인 눈길을 걸으면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우리는 달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율리야는 이바노프를 향해 계속해서 걷는다. 하얀 배경을 보면 어느 쪽에서 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나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이 오는 종류가 아니기에 상관없다. 그저 서로에게 가는 것이니까. 따듯함에 눈이 녹아버리는 일처럼 당연해서 더 궤도를 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때 지구를 가장 가깝게 공전하는 위성이었으나 모든 속도를 포기하고 봄을 향하는 설국에 도착한 것이다. 

​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율리야 파기모브나 오르바카이테

Julia Pagimovna Orbakaite

치즈, 고수

이바노프 일리예비치 시오나

Ivanov Illievich Si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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